엄마는 내게 미안해했다. 어릴 때 날 때리고 욕했던 일들을 너무도 후회하며, 남은 생애를 나에게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거창하고 진심 어린 사과였다. 다만, 그 말을 한 번도 엄마 입으로 들은 것이 없다. 늘 동생이나 아빠를 통해 건너 건너 들었을 뿐이다. 어쩌면 두 사람이 날 위로하기 위해 엄마의 작은 말과 행동을 부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면 엄마는 뭐든 다 해주고 싶다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그 표정을 보면 그 말들이 정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직접 물어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정말 후회해요? 미안하긴 한가요?”
하지만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꾹꾹 눌러놨던 원망이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러지 않을 자신이 생겼을 때는 그 기억을 다시 꺼내 엄마와 나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나간 일을 들춰내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명절날, 여덟 살 조카가 편식을 했다. 올케는 숟가락을 들어 조카의 이마를 ‘탁’쳤다. 금속과 뼈가 부딪히며 나는 소름 끼치고 딱딱한 소리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얼마나 아팠을까. 한마디 하려던 찰나 엄마가 먼저 소리를 높였다.
“아니, 왜 애를 때려? 말로 해도 되잖니. 혜인이가 얼마나 아팠겠어,”
그쯤에서 멈췄다면 좋았을 텐데. 엄마의 말은 길어졌고 속상함의 농도가 점점 짙어졌다. 올케는 무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만하면 된것 같았고 올케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웃으며 말했다.
“에휴. 엄마. 그만해요. 엄마도 나 어릴 때 숟가락으로 이마 쳤잖아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엄마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더니 뺨을 따라 뚝뚝 흘러내렸다.

갑작스런 상황 전개에 당황해서 서둘러 덧붙였다.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올케도 알아 들었을 거라는 거예요.”
체면이 깍여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엄마는 조그맣게 말씀하셨다.
“내가 예전에 그랬는데… 너무 후회돼서 그랬어. 그러면 안되는 거더라고.”
그 말과 눈물은 오래전부터 엄마 안에 고여있던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진심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듣지 않아도 마음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별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래, 나한테 미안하고 후회스럽겠지. 올케한테 자식 때리지 말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엄마가 진짜로 바뀔 수 있을까?
고향에 가면 엄마는 갖은 음식을 정성껏 차려 놓았다. 동생이 좋아하는 고기 대신, 내가 좋아하는 김치부침개를 수북히 부치고 만두를 수십 개씩 빚었다. 반가운 얼굴로 맞이하고 세상 친절하게 군다. 하지만 두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와 함께 있는 것에 진절머리냈다. 내 모든 것이 신경을 박박 긁어대지만 억지로 참고 또 참는다. 마침내 본심이 인내심을 비집고 꿈틀꿈틀 기어 나온다.
“답답한 년. 눈치도 하나도 없어서 저걸 어따 쓰나.”
말을 되돌리려 애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처럼 날 아프게 하는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작별이 가까워지면, 엄마는 어김없이 자신을 탓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감정은 의지대로 되지 않는구나. 얼마나 미웠으면 남은 인생을 사죄로 보내겠다던 진심 어린 다짐이 매번 저렇게 쉽사리 무너질까.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나로 돌아섰다.
나도 엄마도 결국 변할 수 없었다. 엄마가 원하는 ‘눈치 빠른 사람’이 되려 했지만,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내 행동은 늘 한 박자 늦었고 바꾸려 할수록 더 굼떠졌다. 나는 달라질 수 없고 엄마는 아무리 애써도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엄마와의 관계는 여기까지가 최선인가보다, 그렇게 단념했다.
그즈음, 명상으로 엄마에 대한 감정을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엄마의 말들은 어느덧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느려터진 년.”
“멍청하고 눈치도 없는 년.”
“하등 쓸모 없는 년.”
큰소리로 비난을 들으면 어린 시절처럼 겁에 질려 반사적으로 “잘못했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잘못이 상대에게 있을 때조차, 부당한 상황 앞에서 내 목소리를 내야 할 때도, 미릿속은 멈춰 섰고 사과를 반복했다. 그 말들은 이제 나 자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느려터졌어. 눈치가 없고 멍청해. 누가 날 좋아하겠어?’
누군가 나를 좋아하면 감격했고 떠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직장 내에서, 가정에서, 친구 사이에서 내 일이 아닌 것까지 떠안다 보니 체력은 늘 바닥이었고 시간을 늘 모자랐다. 엄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린 시절로도 충분한데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버린 현실이 억울했다. 그래서였다.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해서 명상에 매달렸다.
제법 효과가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와 나에 대한 마음을 되돌아보고 버리다 보니, 엄마를 ‘엄마’라는 존재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잔인한 엄마, 상처 준 엄마, 엄마 자격조차 없는 사람… 그런 생각들이 사라졌다.
부모님과 동생네 가족,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여행을 갔다. 횟집에서 엄마가 가격이 비싸다며 사장님과 언쟁을 벌이셨다.
“무슨 상 차려주는 값이 그렇게 비싸요? 아무리 관광지래도 너무하잖아요! 순전 바가지네. 바가지.”
아빠가 한숨을 쉬며 엄마를 말렸다.
“들어왔으면 그냥 먹어. 관광지 원래 다 이래. 돈 좀 쓰자.”
동생도 거들었다.
“엄마, 그냥 좀 드세요.”
엄마는 울컥해서 젓가락을 테이블에 던지셨다.
“그럼 나 안 먹어!”
젓가락이 테이블 바닥에 튕겨 날아갔다. 아빠와 동생은 체념한 얼굴로 묵묵히 회를 먹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무도 응답하지 않자 자리에서 나가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엄마는 왜 저렇게 돈에 연연할까’, ‘왜 창피하게 굴지’라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엄마가 그렇지 뭐’라고 결론을 내리고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회를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엄마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엄마의 말처럼 물가가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빠와 동생이 엄마를 대놓고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였다. 예전에는 ‘엄마, 제발 그만 좀 해’라는 마음이 너무 커서 보이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아빠와 동생이 어떤 마음인지 알기에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따라나섰다.
“난 안 먹을 거야. 나 신경쓰지 마.”
“엄마가 안 드시는데 어떻게 먹어요. 가서 같이 먹어요.”
엄마의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니 아빠랑 현우가 자꾸 나 무시하잖아. 난 너랑 우진이 아빠가 식사값을 낸다길래 자꾸 돈 많이 쓰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건데.”
엄마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엄마도 상처를 받는 사람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노로만 가득한 줄 알았는데 가족을 걱정하는 여린 마음과 사랑이 숨어 있었다. 아이처럼 훌쩍이며 서럽게 우는 엄마를 끌어안았다. 태어나 처음 엄마를 안았지만 이상하게 늘 그래왔던 것처럼 편안했다. 아기였을 때 엄마가 업고 안아 키워서일까. 기억은 없어도 몸이 기억하는 것일까.
그날 이후로 엄마와 나는 부쩍 가까워졌다. 억지로 잘해주려고 애쓰는 대신, 엄마는 진심을 꺼내 보이려 했고, 나 역시 늘 짐작조자 할 수 없다며 포기했던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책임감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체력과 인내심은 그 무거운 책임을 끝까지 버텨낼 정도로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율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명절마다 꼭 집밥을 고집해도 나는 미리 음식점을 예약했고, 저녁이면 굳이 묻지 않고 치킨을 시켰다.(엄마는 치킨을 무척 좋아하신다.) 엄마가 고향 집에서 자라고 우겨도 “호텔이 더 편하다”며 객실을 잡았다. (엄마는 잠귀가 밝아 누가 있으면 쉽게 잠들지 못하신다.) 그렇게 엄마의 한계를 가늠하고 넘지 않도록 조심하자, 엄마는 잘해주다가도 갑자기 폭발하며 종잡을 수 없게 굴던 모습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는 늘 한달음에 오셨다. 출근을 앞두고 “우진이가 아파요.” 전화 한 통만 하면, 새벽 다섯 시 첫차를 타고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내가 다리 수술을 했을 때도 그랬다. 천식 때문에 밤이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오히려 간병을 하러 오셨다. 간병을 받아야 할 몸으로. 열흘쯤 해외로 명상하러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땐 난색을 보이셨다. 그런데 ‘평생 꿈’이라고 말하자, 엄마는 바로 말을 바꾸셨다.
“딸래미 꿈은 내가 꼭 이뤄줄께.”
그러고는 또 달려오셨다. 시어머님 장례식 내내, 엄마는 하루 종일 내 곁을 지키셨다. 그만 나오시라고 해도 한결같았다. 결국 무리를 하셔서 장례가 끝난 뒤엔 잇몸이 퉁퉁 부어 한 달이 넘게 음식을 제대로 못 드셨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냐고 핀잔을 줬더니 엄마는 말갛게 대답하셨다.
“너 외로울까 봐. 그게 마음이 아파서 그랬어.”
엄마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한 번도 생색을 낸 적이 없었고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했다. 오래전에 포기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바라던 엄마가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걸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엄마는 변한 게 아니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원래 정 많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좋아하는 사람. 그런데 혹독한 삶 속에서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던 건지도 모른다. 병에 걸리면 힘에 부쳐 건강한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아빠는 군인이었고 분대장이었다.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훈련이라도 잡히면 한 달 넘게 얼굴을 보지 못했다. 최전방 근무라 우리 가족은 관사에 살았는데 시장을 가려면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하는 외딴곳이었다. 엄마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두 아이를 키웠다.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동생은 툭하면 정신을 잃었고 엄마는 아빠 없이 혼자서 동생을 들쳐없고 응급실로 달려야 했다. 집에 물이 새면 혼자서 높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 무거운 기와를 걷어내고 비닐을 덮은 뒤 다시 기와를 얹었다. 어린 눈에도 벅차 보이는 일이었지만 엄마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해냈다. 장을 보러 갈 때는 엄마는 동생을 업고 나를 안은 채 양 손에 장바구니를 들었다. 그 시절에는 엄마가 대단히 힘이 센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필사적으로 버텼던 게 아니었을까. 엄마 말고는 그 일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엄마는 남편 승진에 불이익이 갈까 봐 남편 상사의 집 살림까지 맡아야 했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당연한 관례처럼 여겨졌다. 상사의 집에 가기 위해 울며불며 매달리는 네 살배기 나와 세 살배기 동생을 뿌리치고 문을 잠근 채 나갔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문을 닫고 돌아서는 내내 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그랬다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그랬다고. 잘못은 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의 과오를 정당화한다. 나 역시 그랬다. 사회적 관계에서 겪은 어려움을 모두 엄마 탓이라 돌리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매여 서성거렸다. 하지만 엄마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남은 생은 딸에게 지은 죄를 속죄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엄마는 그렇게 나아갔다.
여전히 엄마는 식당이나 시장에서 언성을 높일 때가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엄마가 부끄럽지 않다. 엄마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나 있는지 들여다보고 죠용히 팔을 잡아 당긴다.
“엄마 말이 맞는데 사장님하고 싸워봤자 뭐해. 힘만 들지. 우리 그냥 다른 데 가자.”
엄마는 “아니,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라며 툴툴거리면서도 이내 순순히 따라나선다. 엄마가 화가 나면 통제불능이라고 여겼던 건, 내 착각이었다.
가끔은 엄마와 함께 싸울 때도 있다. 그럴 땐 엄마의 팔을 끌어당겨 내 뒤로 보내고 내가 앞에 선다. 뒤에 있는 엄마는 짐을 내려 놓은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싸움이 엄마의 천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엄마는 나이가 들었고 나는 아직 젊으니까 내가 더 잘 싸운다. 엄마는 논리적으로 또박또박 반박하는 내 전투력에 아주 흡족해 한다.
나는 오래도록 엄마를 나쁜 엄마라 여겼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연약한 몸과 마음으로 어린 자식 둘을 품고 거친 세상을 온몸으로 막아낸, 애처로운 사람이 있었다. 기댈 곳 하나 없이 외로웠고, 애써 사랑했지만 아무에게도 닿지 않아 부서진 날들도 있었다. 나를 아프게 한 존재였으나, 동시에 내가 기댈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엄마를 용서할 생각은 없다.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옹호될 수 없고 부모가 자식을 파괴하는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덮일 수 없다. 그럼에도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 채로도 사랑은 가능했고, 우리는 다시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다. 과거에 멈춰 있을 줄 알았던 엄마와 나의 시간이 지금 함께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교단에 서다 보면, 아이들에게 했던 잘못이 불현듯 떠올라 가슴을 깊이 찌르고 자책감에 한없이 끌려가 버리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엄마를 떠올린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사과할 수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질 방법을 찾고 곧바로 행동하자고.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러 더는 손쓸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믿기로 한다. 그 아이가 상처를 견디고, 그 너머로 자라날 것을. 내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배운 것처럼. 그럴 힘이 이미 그 아이 안에 흐르고 있음을. 그 아이는 상처보다 약하지 않다.
살아 있는 한, 상처가 아무리 커도 존재보다 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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