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기적이야, 기적

사이를 걷는 사람 2026. 5. 3. 20:42

따뜻한 봄날의 공원

 

엄마에 대한 글을 세 편 쓰고 여러 사람에게 권유를 받았다.

엄마랑 직접 학대에 대해 대화해 보는 게 어떨까요?”

그때마다 머리를 저었다. 이유는 매번 달랐다. 지난 일을 들춰 엄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괜찮아서 굳이 대화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 남아 있는 원망과 분노가 혹시 폭발해 엄마를 겨눌까 무서웠다. 유년 시절에 폭력을 휘둘렀던 사람도 엄마지만 내가 무릎 수술을 했을 때 천식으로 쌕쌕거리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병간호를 해 준 사람도 엄마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의 큰 대학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보호자가 밤에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날 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고 있는데 엄마가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왔다.

엄마, 어떻게 왔어요?”

면회 시간 끝나고 계단으로 갔어. 거기서 두어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몰래 왔어. 너무 추워서 상자를 덮었더니 좀 낫더라.”

엄마의 손은 파랗게 얼어 있었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빨간 딸기가 그려진 옷을 입은 세 살배기 아기가 튤립 화단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아기 곁에서 아빠와 엄마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연분홍, 빨강, 노랑 튤립이 만발한 공원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져 전화를 걸었다. 서로의 건강을 묻다가 생각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라면, 무거운 이야기를 아프지 않게 꺼낼 수 있지 않을까.

 

엄마, 나 하나 뭐 물어봐도 돼?”

그래.”

어릴 때 왜 날 때렸어? 많이 힘들었어?”

힘들어서 그랬어. 미안해.”

어떤 점이 그렇게 힘들었어?”

결혼할 때 아무것도 몰랐어. 살림을 해 본 적도 반찬을 만들어 본 적도 없었거든.”

엄마 시대의 여자들은 다 집에서 살림을 배워서 잘하는 줄 알았다. 엄마도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한 줄 몰랐다.

 

엄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결혼은 했지만 엄마는 늘 혼자였다. 아빠는 승진에 누락되었고 어떻게든 승진하려고 거의 부대에 살다시피 했다. 엄마는 두 번의 유산을 했다. 의사는 뱃속에서 죽은 아기를 꺼내다 핏줄을 잘못 끊었고 피는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옆에 있던 모르는 할머니가 저 조그만 몸에서 어찌 저렇게 많은 피가 나온다냐할 정도였다.

 

그 뒤로 몸이 안 좋아졌고 임신을 다시 못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들어섰다.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아빠는 바빠서 며칠 동안 오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딸 낳아서 서운해서 저런다냐.”하셨다. 엄마는 사개월만에 동생을 또 임신을 했다. 엄마가 동생을 낳을 때도 아빠는 옆에 없었다.

 

우진이를 낳을 때, 나는 죽을까 봐 무서웠다. 내 곁에는 엄마, 아빠, 남편이 있었다. 엄마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아빠와 남편은 통증을 없애 주는 발목의 혈자리를 열두 시간이 넘도록 교대로 눌러 줬다. 아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기 낳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의아했다. 나와 동생을 낳았는데 왜 저런 말씀을 하시지?

 

아니, 아빠는 또 엄마 곁에 없었어요? 아빠, 너무 했네.”

엄마는 웃었다.

아빠도 아빠 나름으로 치열하게 산 거지.”

엄마는 나를 이웃 엄마에게 맡겼다. 동생은 미숙아로 태어나서 인큐베이터가 필요했지만 그 병원에는 없었다. 진해에서 마산으로 가야 했지만 주변에는 엄마를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기는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데 나는 그저 기도밖에 할 수 없었어.”

엄마의 목이 메어왔다.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아빠는 사흘이 지난 후에야, 외할머니를 모셔올 수 있었다. 외할머니는 멀미가 심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며칠간 정신을 못 차리고 드러누우셨다. 엄마는 피를 많이 쏟아서 일어나면 어지러워서 집이 몇 번을 돌았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정신을 못 차리지, 두 살배기 나와 갓 태어난 동생은 돌봐야 하지, 엄마는 망연자실했다. 그 몸을 이끌고 셋을 돌봤다. 그때의 엄마는 나와 같았다. 허리 디스크에 걸려 의사가 절대 무거운 것을 들지 말라고 했지만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 우진이를 들었다. 한의원에서 고슴도치처럼 침을 잔뜩 꽂은 채로, 등을 활처럼 휘며 우는 아이를 차마 보지 못해 품에 안았다. 침이 깊숙이 박힐까 두려우면서도 끝내 놓을 수 없었다.

 

강원도에 우리가 들어가 살기로 한 아파트가 있었어. 그런데 아빠가 그 아파트를 신혼부부에게 양보한 거야. 그게 말이 되니? 아빠가 단독 주택을 얻었는데. 세상에. 방 두 칸을 얻었는데 한 칸은 딴 사람이 살고 있었어. 집도 그냥 기여들어가고 기어 나오는 집이었어. 그리고 강원도 얼마나 추워? 근데 아궁이에 물이 차 방에 불도 못 넣어. 그런 상태에서 몸조리는 고사하고.”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어린 시절 엄마는 아빠를 향해 이런 말을 내뱉곤 했다.

지만 착하지. 지만 고결하지. 지 때문에 가족은 죽어 나가는 지도 모르고. 이기적인 새끼.”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아빠는 다정하기만 하고 가족들에게 잘하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가 항상 문제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엄마에게 분노조절장애라는 병명까지 붙였다.

 

세상에. 너도 애기지. 민호는 숨을 깔딱깔딱하지. 안집 딸래미 못된 년이 덩치가 컸어. 그런데 네가 답답하니까 거실로 나가면 너를 두들겨 패는거야. 그래서 너를 데리고 나와서 돌아다니고 민호는 햇빛도 안 드는 방에 뉘어 놓았어. 몸무게도 안 나가는 애를. 그렇지 않아도 약한 애를. 그랬더니 애가 거기서 천식이 딱 걸려 버린거야.”

엄마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항상 동생이 1순위이고 나는 후순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1순위였던 시간이 있었다. 그것도 동생이 가장 연약했을 때. 엄마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이자 죄책감이었을 그 시간. 엄마가 동생에게 한없이 관대했던 시간들이, 맛있고 몸에 좋은 것들은 항상 동생 밥 위에 올라갔던 것들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나도 엄마라면 그랬을지 모른다.

에휴. 그랬으니 내가 내 정신에 살겠냐.”

엄마는 허허하고 웃었다. 동생은 천식 때문에 병원에 자주 가야했고 엄마는 나를 이웃집에 맡겼다. 민호는 숨을 못 쉬어서 밤에 잠을 못 잤고 엄마는 수많은 날들을 민호가 죽을까 봐 뜬눈으로 밤을 샜다.

기적이야. 기적. 그래도 산 것이.”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산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그것만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사랑을 갈망할 수 있었던 것도, 상처를 품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엄마가 온몸으로 만들어 준 자리 위에서였다.

 

튤립 화단이 끝나고 계단으로 둘러싸인 탁 트인 광장이 나왔다. 햇살이 이마를 따갑게 두드렸다.

 

근데 나 하나 더 궁금한데 엄마가 어릴 때 나보고 자꾸 멍청하다고 했잖아요.”

아니야. 너 똑똑했어.”

그런데 왜 그랬어요?”

마음은 바쁘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나는 질문을 했고 대답을 들었다.

 

엄마가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그 시절이 아무리 힘들었다고 해도, 나를 때리고 폭언을 퍼부은 것은 잘못된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물었던 것은 학대 그 사실보다 끝내 떨쳐낼 수 없었던 진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엄마는 내가 정말 미웠던 것인지, 내가 둔하고 멍청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그 의문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내 존재를 흔들어대며 공중으로 흩어지고 싶게 했다.

 

처음으로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엄마의 어린 시절을 물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잘 자랐지.”

늘 다급하고 불안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잠시 부드러워졌다. 그 당시에는 엄마 나이 때 여자가 대학교 나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엄마는 서울에서 전문대를 나왔고 독일을 가서 간호사 생활도 했다. 젊은 시절 사진에서 엄마는 유럽 어느 바에서 최신 유행하는 나팔바지를 입고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1970년대 고전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았다. 얼굴만 똑같은 다른 사람 같았다. 늘 내가 보던 남색 잠바와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지극히 평범하고 촌스러운 엄마가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유럽 여행을 다니며 자유롭게 살던 엄마는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아무것도 모른 채 결혼을 했다. 만나고 한 달만에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너무 힘들었지. 상황이 그랬어도 난 항상 마음 속에 우리 딸, 아들 어떻게든 잘 건사해야지 그 마음밖에 없었어. 지금도.”

 

밤이면 엄마는 늘 촛불을 켜고 성모마리아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빠의 승진을, 민호가 건강하기를, 내가 건강하기를,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를. 내가 결혼하자 기도는 남편과 우진이에게까지 뻗어갔다. 엄마의 기도에는 엄마가 없었다. 오직 우리를 위한 기도뿐이었다.

 

엄마 인생이 참 고달팠겠다.”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시어머니가 결혼 후 사개월만에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그 전에 엄청 예뻐해 주셨고 지금도 고모들은 우리 오빠한테만 잘해 주라고 했다고 웃었다.

무엇보다 내가 잘 키우지 못했는데도 너와 민호가 잘 자라준게 너무 고마워.”

 

아빠한테도 미안하다고 했다.

뭐가 미안해요?”

미안하지. 사기당해서 돈 다 없앴으니까. 살기는 엄청 열심히 살았는데 병신 육갑짓을 그 지랄을 해놓고. 그런데 지금도 욕심 낼 것 없이 연금으로 먹고 살면 되니까 괜찮아.”

엄마는 세 번의 사기를 당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엄마는 상심해서 드러누웠다. 아빠는 그때마다 한 번도 엄마에게 역정을 낸 적이 없었다. 내가 다 해결할 테니 당신은 걱정하지 말고 건강만 해 달라고 했다.

아빠 같은 사람 없어.”

지만 고결하지. 지만 아는 이기적인 새끼.’라는 말은 내 가슴에만 박제되어 있었다. 엄마의 말은 시간이 흐르며 아빠 같은 사람 없어.”로 바뀌어 있었다.

 

진짜 마음이 아픈 내 딸, 잘 커서 고마워. 애기 못 낳을 때 네가 수호천사처럼 와줬어. 그것부터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데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너는 나의 수호천사야.”

 

언젠가 최면 상담에서 내가 그려낸 엄마는 말했다.

네가 없었으면 난 너무 힘들어서 아마 살아 있지 못했을 거야.

 

현실의 엄마가 말했다.

너는 나의 수호 천사야.

 

어린 시절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었다. 혼자서 그 상처를 봉합하려 했고 성공한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와 직접 마주하고 나서야 알았다. 봉합이 아니라 외면이었다는 것을. 날 아프게 해서 엄마도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저 죽을 것 같이 힘든 나날에도 나와 동생을 살리며 살아 준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비명을 묵묵히 조그만 몸으로 버티며 살아낸 어린 나에게도.

 

교실에서 아이들을 바라볼 때, 나는 가끔 어린 나를 떠올린다. 아무도 몰랐던 기적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없이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