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증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아빠는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이야기를 엄마에게 꺼냈다.
“예전에 알던 사람인데 말이야. 얼굴이며 온몸에 하얀 반점이 퍼져 있었어. 괴물 같더라. 끔찍했어.”
진주 목걸이로 가려보려 했지만 가려지지 않아서 짠했다고 했다. 아빠는 사람이 그렇게도 변할 수도 있다며 놀라워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 년 전부터 내 몸에도 흰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빠가 말한 그 ‘괴물 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아 심장이 떨렸다. 무서웠다. 두려움을 견딜 수 없어 말을 급하게 쏟아냈다.
“아빠, 흰 반점이라면 나도 있어요!”
아빠와 엄마는 일시 정지된 것처럼 그대로 멈췄고 정적이 흘렀다. 아빠는 정신을 차리시고 내 손과 눈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병원에 갔더니, 백반증이라고 했다. 백반증은 피부 색소를 만드는 멜라닌 세포가 약해서 흰색 반점이 생겨 퍼져나가는 질환이며 흔히 백납이라고도 불린다. 의사 선생님은 불치병이라며 레이저, 약물, 연고 등의 치료를 할 수 있지만 진행을 더디게 할 뿐이라고 하셨다. 점점 나빠질 일만 남았다는 것은 암울했다. 나중에 얼굴과 몸에 흰 반점이 가득해졌을 때 놀라고 혐오하는 시선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엄마는 친척 중에 백납이 있는 사람이 있다며 엄마가 물려준 거라며 자책했고, 아빠는 엄마를 원망했다. 어느 쪽이든 듣기 싫었다. 나 때문에 부모님이 힘든 게 괴로웠고 내 존재가 고통의 근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백납 따위 아무것도 아닌 듯이 씩씩하게 살고자 했다. 친구가 손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남들보다 피부 색소가 약해서 그래. 유전병이고 옮기는 병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다. 그러면 엄마와 아빠가 덜 속상해할 것 같았고 내 존재가 더 이상 아픔이 아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학교 이 학년 여름, 엄마와 나는 외출을 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다. 엄마는 왜 목 부분이 파인 옷을 입었냐고 화를 냈다. 흰 반점이 다 보인다며 옷깃이 높은 옷을 입으라고 했다. 엄마는 단지 백납이 덜 보이게 하려고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존재를 부정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백납이 있는 나를 엄마는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에 태어나게 한 엄마마저 부끄러워하는 데 과연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할까? 한없이 작아졌고 세상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고 선생님이 되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는 점점 커지는 흰 반점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 고민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반응은 대략 세 부류로 나뉘었다.
첫 번째 사람들은 별것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주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문제가 아니야. 네가 말하기 전까지는 잘 안 보였어.”라고 했다. 괜히 과민 반응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머쓱해졌다. 그리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화들짝 놀라며 손이 왜 이러냐고 묻는 사람들은, 불쌍하게 바라보며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렸냐며 군데군데 탈색된 내 손을 쓰다듬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는 외침이 솟구쳤다. 하지만, 위로하고 싶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외침을 삼켰다.
두 번째 사람들은 백반증을 하나의 개성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흑인 모델 위니 할로우를 예로 들었다. 위니 할로우는 어릴 적, 까만 피부에 얼룩덜룩 생긴 흰 반점 때문에 젖소, 얼룩말이라고 놀림을 받아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델이 되었다. 패션 잡지 속 그녀는 피부 속에 박혀 있는 하얀 점들이 무늬처럼 보여 남들과 다른 매력이 있어서 근사했다고, 그 모델처럼 멋지게 살아가면 좋겠다고 했다. 위니는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공개하며 이렇게 적었다.
“나는 타인 의견을 기준으로 내 아름다움을 정의하지 않아요. 내가 아름다운 이유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가 각자 가진 아름다움을 축복하는 시간을 갖길 바래요.”
그 글은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녀는 괜찮은 척하는 것 같았다. 아름다움이 모든 것인 모델 세계에서 치명적인 피부 결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파격적인 도전을 한 그녀는 대단하지만 정말 자신이 가진 흰 반점들을 개성이라고 생각할지는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아마 그렇게 생각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라면 나도 하고 있긴 하지만 백납이 병이라는 것은 진실인데 왜 그래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개성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피부가 흉하게 변하는 것도 버거운데 긍정적으로 보라는 과제까지 하나 턱 얹혀져 숨이 막혔다.
세 번째 사람들은 불쌍하게 봤다. 어쩌다 그런 병에 걸렸냐고 안쓰럽게 여겼다. 그러면 죽는 병도 아니고 나름 잘 먹고 잘사는 데 이런 동정을 받는 것이 겸연쩍어졌다. 이쯤 되니, 도대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거냐고 스스로에게 슬슬 짜증이 났다.
현성이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백반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도 나랑 결혼하고 싶을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너무도 쉽게 말하고 다녔는데, 이상하게 현성이한테만큼은 그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백납이 있고 앞으로 점점 더 번져서 모습이 변할 거라고 고백했다. 현성이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네가 백납이 없어서 사랑한 게 아니야. 네가 연이라서 사랑한 거야. 백납이 있든 없든 네가 연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변함이 없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피부 곳곳에 색깔이 빠져 외모가 흉하게 바뀌면 현성이의 사랑이 변할까 두려웠고, 버림받을까 무서웠다. 그런데 현성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자기 바람피워도 돼. 내가 백납이 있으니까 예쁜 여자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만나도 돼. 나 이해해 줄 수 있어.”
현성이의 견고한 사랑의 맹세에 대한 나의 울음 섞인 대답은 자기 비하와 혐오가 버무려진 찌질 그 자체였다. 말 같지 않은 말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웃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끌어안았다. 굳이 그가 말하지 않아도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품속에서 숨죽이며 울었다. 꼭꼭 감추어서 나조차도 몰랐던 여린 마음이 현성이의 사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백납이 있어도 사랑한다’였나 보다. 아니, ‘백납이 있든 없든 너의 존재는 변함없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였다.
드라마 ‘연인’에서 이장현은 사랑하는 사람인 길채에게 말한다.
“가난한 길채, 돈 많은 길채, 발칙한 길채, 유순한 길채, 날 사랑하지 않는 길채, 날 사랑하는 길채, 그 무엇이든 난 길채면 돼.”
그러자 길채는 숨겨 두었던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며 용기를 내어 묻는다.
“좋아요. 허면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
이장현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느니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은 나의 의무이고 ‘살아 있어 줘서’는 네가 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내가 책임이 되어 버리고 나에게는 산다는 것이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은 무겁고 슬프다. 이장현은 길채를 안아준다.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그 장면이 너무나 좋아서 몇 번이나 돌려 보았다. 오랜 시간 동안 얼어 있어서 얼어붙은 줄도 몰랐던 마음이 녹아서 눈물로 흘러내렸다. 어린 시절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백납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엄마와 아빠는 누구 책임인가를 따졌고 나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에 급급했다. 병이 없는 건강한 아이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하지만,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어 병이 있는 채로 엄마의 부끄러움이 되어 살아야 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수치를 버터야 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부모님은 절망에 압도되어 병을 갖고 있는 것은 나인데도 내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지 묻지 않았다. 좋다는 병원을 찾아보고 치료받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관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병이 아니라 나를 바라봐 주고 괜찮냐고 물어봐 주었으면 어린 시절의 나는 덜 힘들지 않았을까.
백납에 대한 세 가지 답변 속에도 어린 시절의 부모님처럼 그들만이 있었고 내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개성으로, 불쌍한 것으로 규정지었다. 내가 백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었던 것은 살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백납으로 인해 한없이 작아져 꺼질 것 같은 잉걸불 같은 나를 향해 불어 주는 따뜻한 숨결을 느끼고 다시 살아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장현은 길채가 욕을 당해서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치욕을 견디고 있는 길채의 존재 자체에 온 마음을 쓸 뿐이었다. 그래서 길채는 욕을 당한 길채가 아니라 길채 그 자체로 돌아갈 수 있었고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길채처럼 백납을 가진 내가 아니라 그냥 내가 되어 살고 싶었다.
현성이한테 그토록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데 고민은 계속되었다. 모든 사람이 현성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백납 너머의 존재 자체로 바라봐 주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사람은 그렇게 봐줄까? 저 사람은? 어른들도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이 과연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즈음 목욕탕에 갔는데 열 살 남짓한 아이가 나를 보고 멈칫했다. “저 사람 왜 저래?”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엄마에게 달려가 손을 꼭 붙잡았다. 엄마 곁에 바짝 붙어서 경계하는 눈을 보며,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무서워하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선생님을 할 수나 있을까. 끊임없는 번뇌가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또 묻기 시작했다.
백납이 있어 아이들이 무서워하는데 선생을 계속하는 것은 욕심이지 않냐는 물음에 명상 캠프에서 만난 언니는 내 눈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힘들었겠다. 하지만 네가 백납이 있어서 아이들한테 더 좋을 거야. ”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해졌다.
“아이들은 너를 만나 백납이 무엇인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될 거야. 네가 선생님이니까 자연스럽게 숨처럼 익혀지는 거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잖아. 그것은 다시 없는 경험이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엄마의 죄책감이자 아빠의 원망, 아이들의 두려움이었던 본래의 색깔을 잃어가고 있는 피부들이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함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백납이 아이들에게 가치 있는 배움을 선사해 줄 수 있다는 다른 가능성을 알아차리게 되어 심장이 두근거렸고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들떴다.
하지만 해답을 찾았다는 기쁨은 채 몇 달이 가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무거운 돌덩이가 남아 있었다. 그 돌덩이는 내게 물었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백납이 있는 너는 살 가치가 있는 거니?”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돌덩이는 다시 물었다.
“그럼, 백납이 있는 너는 왜 살아야 하지?”
그제야 나는 비로소 내 안의 목소리를 꺼냈다.
“내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때 처음으로 내 생각을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저곳 색이 빠져가는 피부에 대해 남들에게 끊임없이 물으면서 나 자신에게는 묻지 않았다. 앞으로 더 늘어갈 불규칙한 흰 반점들을 지닌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면서도 정작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대하지 못했다.
물음의 끝은 내가 ‘백납이 있는 나’를 긍정하는 것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피부에서 한참 벗어난 내 피부는, 부모님의 절망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의 두려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한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귀중한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얼룩덜룩한 피부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였다. 중심을 타인이 아니라 나로 옮기자, 거대한 줄로만 알았던 나의 존재를 바라봐 달라는 갈망이나 바라봐 주지 않았을 때의 서글픔은 급격히 힘을 잃고 점점 사라졌다. 본래의 색을 잃어가는 피부를 통해 존재가 부정당했을 때 얼마나 아픈지, 존재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내 존재를 뒤덮고 있던 것은 백납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주었다고 여겼지만 결국 내가 고른 절망, 무서움, 갈망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어둠을 걷어내자, 진짜인지 의심하며 외면했던 위니 할로우의 글이 새롭게 다가와 마음을 울렸다.
“나는 타인 의견을 기준으로 내 아름다움을 정의하지 않아요. 내가 아름다운 이유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가 각자 가진 아름다움을 축복하는 시간을 갖길 바래요.”
그 글은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시선에 잡아먹히지 않고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며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녀는 진짜였고, 아름다웠다.
상처로 어둠 속을 걸어온 이들에게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축복하는 시간이 햇살처럼 따뜻하게 흩뿌려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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