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살아 있는 삶이 다시 찰랑거릴 때

사이를 걷는 사람 2026. 5. 26. 18:36

 

진통이 시작된 지, 삼십 시간이 넘어갔다. 통증을 수치화해서 보여주는 미터기는 이미 한계치인 100을 넘은 지 오래였다. 찌릿찌릿한 고통이 칼날처럼 온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더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께 무통 주사를 놔달라고 했더니 자궁문이 6센티미터쯤은 열려야 한다며 확인해 보신다 했다. 삼십 시간이 넘었으니 어느 정도 열려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돌아온 숫자는 1센티미터. 남들은 그냥도 열린다는 1센티미터에 삼십 시간이 걸렸다니, 도대체 언제까지 이 고통을 견뎌야 하는 걸까. 정신이 아득해졌다. 제왕절개라는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몸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더는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밀려온 것도 잠시, 갑자기 몸이 차가와졌다. 온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바들바들 심하게 떨렸다. 마취과 선생님이 놀라며 다급하게 말했다.

부분마취는 안 되겠어요. 전신마취 할게요.”

 

눈을 뜨자, 간호사 선생님이 하얀 이불로 똘똘 만 아기를 보여줬다. 우진이는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웃음이 빵 터지셨다.

어머, 애가 배가 고픈가 봐요.”

마취가 덜 깨서 흐릿한 눈에도 우진이의 검정 눈동자가 또렷하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우진이는 어느덧 자라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우진이의 눈빛은 태어난 그때와는 달리,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다. 우진이에게 힘든 일이 있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했다. 하지만 우진이는 학교로 집으로 학원으로 끌려다니는 그림자 같았다. 갖은 고민 끝에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하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우진이는 발로란트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발로란트는 13라운드 동안 공격과 방어를 번갈아 오가며 사격과 전략을 겨루는 게임이었다. 계급은 아이언에서 시작해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 다이아몬드, 초월자, 불멸, 레디언트 순으로 올라간다. 우진이는 그중 다이아몬드 3이었다. 꽤 높은 등급이었다. 게임에 많은 시간을 쏟는 편도 아닌데 그 정도 실력이라니 놀라웠다.

엄마, 난 재능이 있어. 3 겨울방학 동안은 게임에만 몰두해서 내 가능성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어.”

 

3 겨울방학은 고등학교 성적을 가르는 결정적인 시기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누누이 들어왔던 터였다. 그때 공부에 힘을 쏟으면 웬만큼 공부를 해 오던 우진이는 상위권으로 충분히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을 게임에 다 쓰겠다니 걱정이 되었다. 다시 올 수도 없는 기회를 날려 버리겠다니. 아까웠다.

 

하지만, 우진이의 반짝이는 눈을 다시 보고 싶었다. 살아지니까 마지못해 사는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기준을 하나 세웠다. 3 겨울방학 동안 게임에 집중해 불멸 등급에 오르면 그때부터는 프로게이머의 길을 본격적으로 준비한다. 거기까지 닿지 못한다면 다시 공부로 돌아온다.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구체적으로 목표와 기한을 설정하는 우진이의 태도는 믿음직했다.

 

프로게이머의 길

 

우진이는 아침부터 밤까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게임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시작했는데 막상 그 모습을 보니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게임 중독이 되는 건 아닐까. 방송에서 쏟아내던 갖가지 영상들과 괴담들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떠다녔다. 게임에 빠져 사회성이 떨어져서 히키코모리가 되기 쉽다는 오래전 영상부터 게임 중독이 되어 먹는 것과 자는 것조차 잊어버려서 3일 동안 게임만 하다가 쓰러져 죽었다는 뉴스 기사까지 떠올랐다.

 

하지만,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우진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해 아이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던 그때를. 몸도 마음도 이미 한계에 닿아 있던 날들에도 우진이는 늘 내 얼굴부터 살피며 말했다.

괜찮아.”

결코 괜찮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 혼자 버티고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외면했다. 도움을 청했을 때 돌아올, 귀찮아하는 얼굴과 짜증 섞인 목소리가 무서웠다. 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 모른 척했다.

 

결국 우진이의 몸과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그제야 만신창이가 된 우진이 앞에 섰다. 아이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나였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심장이 찔리는 것 같았다. 숨이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우진이가 다시 일어서기까지 칠 년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도 우진이는 그 시절의 흔적을 안고 약을 먹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다짐했다. 다시는 우진이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지금은 그 결심을 다시 끄집어내 단단히 붙잡을 때였다. 우진이가 믿고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야 할 순간이었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마음을 붙잡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마음은 틈만 생기면, 우진이가 게임 중독에 빠져 세상과 단절된 채, 아무런 직업도 못 갖지 못한 낙오자로 살아가는 극한의 상황을 상상하며 한없이 달려 나갔다. 그때마다 그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은 힘들었다.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한 지 이 주쯤 지난 어느 날, 우진이는 거실로 나와 말했다.

엄마, 프로게이머가 되려고 하니까 게임하는 게 달라졌어. 예전에는 그냥 나만 혼자 잘하면 되고 즐기면 되니까 아무 생각 없이 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팀을 어떻게 이끌어야 이길 수 있을까, 팀 안에서 내가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어. 팀원들에게 해야 할 일을 부탁하면서 어떻게 말하면 내 말을 믿고 따라줄까도 고민해. 이젠 팀원들이 날 믿고 따르고 어떤 친구들은 나한테 프로게이머냐고 묻기도 해.”

 

우진이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사회성에 대한 우려는 괜한 걱정이었다. 우진이는 게임 안에서 팀의 목표를 향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자기 역할을 찾아가며,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부탁해야 하는지도 배워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따른다는 자부심도 키워 갔다. 게임이 우진이를 좁은 세계로 가둘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속에서 삶을 배우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3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우진이는 초월자 3에서 불멸이 되려고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프로게이머의 조건인 불멸에 닿지는 못했지만, 금세라도 손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우진이의 고민은 점점 깊어졌다. 두 갈래로 나뉜 길 앞에서 선택은 우진이의 몫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끝도 없이 살폈다. 어떤 길이 아이에게 진짜 좋은 길인가. 한 번뿐인 인생인데,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공부를 고른다면 미련이 남지 않을까.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하고 싶은 것을 접고 사회가 정해 놓은 안전한 길로 가는 것은 아쉽지 않나. 그렇지만 프로게이머의 길을 걷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쩌지. 그때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까. 괜히 게임 안에만 머물다가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할 중요한 시기만 놓치는 건 아닐까.

 

문득, 깨달았다. 어떤 길을 선택해도 나는 불안하다는 것을. 두 길은 불안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이토록 불안한 걸까.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우진이의 눈이 아니라 나의 기준과 사회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보고 있었다. 우진이의 말을 진심으로 귀로 들었으니, 이제는 나와 사회의 눈이 아니라, 우진이의 눈으로 볼 차례였다. 그 눈으로 두 길을 다시 보았다.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던 초조함이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 고요한 평온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겨울방학이 끝나는 날, 우진이가 물었다.

엄마,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잠시 우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잃었던 빛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엄마는 네가 눈이 다시 반짝이게 돼서 정말 기뻐. 어느 쪽을 선택해도 좋아. 프로게이머가 된다면, 남들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길을 벗어나는 거니까 그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할 거야. 그 선택을 한다면 엄마는 우진이가 모험심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 반대로 포기한다면 그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야. 지금 불멸을 눈앞에 두고 있잖아.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그 순간에 멈추는 건 엄청난 자제력이 필요하지. 사람들은 그 조금만 더라는 욕심 때문에 자신을 망가뜨릴 때도 많거든. 그러니까 어느 쪽을 택하든 괜찮아. 둘 다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이고 배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길이야. 그래서 엄마는 뭐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

우진이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진지하게 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우진이는 프로게이머의 길을 포기했다. 게임이 즐겁고 행복해서 그 길을 꿈꿨지만, 막상 해보니 공부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매 순간의 승패가 전부인 세계에서, 이기고 지는 일에 마음이 휘둘리다 보니 자신이 점점 메말라가는 걸 느꼈다고도.

공부가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게임보다는 덜 힘들어.”

우진이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게임이 아니라 공부를 택했지만, 우진이의 눈빛은 여전히 빤짝였다. 아무 고민 없이 공부만 하다가 인생이 결정되는 게 지루하고 싫었는데, 이번에 다른 세계를 깊이 경험하며 스스로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 공부가 예전처럼 하기 싫지 않다고

 

마취가 덜 깬 눈으로 처음 그 검은 눈동자를 마주했던 순간이 문득 겹쳐졌다. 한동안 잃었던 그 빛이 다시 돌아왔다. 살아 있는 삶이 그 안에서 찰랑거리며 눈부시게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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