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선생님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이다. 나처럼 상처 입은 아이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고 싶었다. 내가 맡은 모든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며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고 아이들을 위해 재미있는 활동도 많이 준비하고 다정하게 어깨도 토닥여 주었다.
그런데 일방통행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사랑한다는 말에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아이들은 왜 날 좋아하지 않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하긴 했지만, 뾰족한 수도 없어서 더 과장되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따뜻하게 손도 더 많이 잡아 주었다. 그런데 여전히 외사랑이었다. 내가 보내는 사랑이 반사판을 맞아 튕겨 오는 느낌이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원래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가 명상을 하게 되었다. 명상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마음을 빼는 것이었다. 명상을 하며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을 하나씩 없애 갔다. 명상을 지도하시는 분은 그렇게 없애다 보면 모든 마음이 사라져 본래의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 우리 마음으로 덧씌워진 세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고 하셨다. 마음을 없앨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명상을 하면 주체할 수 없었던 진한 원망, 미움, 슬픔, 분노, 기쁨, 사랑의 감정이 점점 맑아져 가는 게 신기해서 열심히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에게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따뜻하게 손도 안 잡아 주게 되었다.
학부모 상담 주간이었다. 학부모님들마다 오셔서 우리 아이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진심을 다해 말씀하셨다. 작년에 아이들에게 마르고 닳도록 사랑한다고 말하며 애썼을 때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올해는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손도 잡아 주지 않는데 왜 우리 아이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시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00이는 어떻게 제가 00이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을까요?”라고 여쭤봤다.
“ 00이는 선생님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랑을 느낀대요. 00이가 선생님을 볼 때마다 선생님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00이와 눈을 마주친대요.”
아... 사랑의 출발점은 사랑의 대상인 아이들이어야 하는 데, 예전의 내 사랑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사랑을 해줘야지에 집착한 나머지, 정작 사랑의 대상인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라는 역할 놀이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런 줄도 몰랐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명상으로 사랑을 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버려지니, 이제야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사랑은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을 하며 지금 여기 함께 있는 거였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오늘도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별것 아닌 일에도 바닥을 구르며 웃기도 하고, 세상이 무너진 듯 엉엉 울기도 하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말갛게 웃는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를 보면 좋아서 아기 캥거루처럼 두발로 콩콩 뛰어오기도 한다. 예쁜 꽃을 선생님께도 보여 드리고 싶었다며, 길바닥에서 주운 꽃잎이 성치 않은 꽃을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내밀기도 한다. 과자 박스에 정성껏 검정 테이프를 둘러 선생님 목 아플 때 마이크로 쓰라고 주기도 한다. 마이크 위가 뚫려 있어 소리를 내면 빈 통이 울려서 제법 큰 소리가 난다. 과제를 다시 고쳐 오라고 하면 울 듯이 입을 삐죽삐죽 대기도 하지만, 과제를 성의껏 다시 하고, “어려움을 이기고 결국 해낸 00이가 자랑스럽다.”라는 내 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슴을 자랑스럽게 내밀기도 한다.
너희들의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생명력으로 가득 찬, 지금 이 순간을 나와 함께해 줘서 영광이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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