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운동회날이다. 옷장을 뒤졌지만 운동복 하의는 많은데 상의가 없었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을까 했지만 그마저도 없었다. 결국 청바지에 반팔 등산복 상의에 팔토시를 하고 챙 넓은 꽃 달린 갈색 모자, 선글라스를 낀 기괴한 차림으로 학교를 갔다. 아직 3학년인 아이들은 평상시에 셔츠에 검정색 정장 바지를 즐겨 입던 나의 색다른 모습을 신기해했다.
“선생님, 왜 수영복 입고 오셨어요?”
등산복에 팔토시가 래쉬가드처럼 보였나보다. 전혀 예상치 못 한 질문에 뇌에 버퍼링이 걸려 있는 사이,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름 대답을 찾은 듯 탄성을 질렀다.
“아, 오늘 운동회라서 학부모님들 오니까 특별히 수영복 입었구나.”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 왜 내가 학부모님들 오시니까 특별히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나의 옷차림을 괴상망측하게 보지 않고 간만에 학교에 오시는 부모님들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옷으로 여겨주는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선생님, 모자에 꽃이 두 개나 달렸어요. 챙도 넓네요. 섹시해요.”
“맞아요. 섹시해. 섹시.”
아이들은 서로 맞장구를 쳤다. 웃음이 슬며시 나왔지만 선생님 모드가 발동했다.
“선생님한테 섹시하다는 말 하는 것 아냐.”
그러자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섹시해서 섹시하다고 한건데 왜요?”
순간 난감해졌다. 섹시하다는 말은 성희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을 할까 했는데 투명하고 깨끗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들을 보니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예쁜 마음을 소중하게 보호해 주고 싶었고 섹시하다는 말에 근사하다는 뜻만 듬뿍 담아 놓은 아이들을 성희롱이라는 어른의 개념으로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섹시하다는 말에 성희롱을 떠올리는 내 마음이 오히려 더럽다고 느껴져 누가 누구를 가르친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담백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그래도 그러면 안돼.”
모르겠다. 성희롱 교육은 내년 선생님에게 토스. 아이들은 납득은 안 가지만 선생님이 그러라고 했으니 뭔가 타당한 이유가 있으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면 단어의 상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뜻을 알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쉬는 시간에 네 명이서 이야기하며 놀다가 한 친구가 삐진 것을 봤다. 그 친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채 입을 샐쭉거리고 있었다. 세 명의 친구는 그 친구를 놔두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 우리 회의를 하자. 예서는 왜 울까?”
“ 관종이라서 그래. 관심 받고 싶어서.”
“ 맞아. 예서는 관종이야.”
당장 끼여들어 친구한테 어떻게 관종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냐고, 그런 비하하는 언어를 쓰면 안 된다고, 친구가 속상해하면 이유를 알아보고 마음을 플어 주어야지 않냐고 다다다다 말하고 싶었으나 섣부른 개입이 아이들 사이를 더 망가뜨릴 수도 있어서 일단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 관종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이 놀지 말아야 해.’, ‘예서한테 관종짓 그만 하라고 하자.’라는 무시무시한 대답을 상상하며 여차하면 말리려고 긴급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 관종에게는 관심이 필요해.”
“ 그럼 우리 예서에게 관심을 주러 가자.”
아이들은 우르르 예서에게 가더니 예서의 머리와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관심이 필요하지? 우리가 관심을 줄게.”
그리고 예서를 위한 특별 공연이라며 웃긴 표정을 짓고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이상한 춤을 추었다. 말없이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던 예서가 활짝 웃었다. 울어서 빨개진 얼굴이 발그레하게 환하게 피어나는 모습이 복숭아꽃 같았다.
관종은 국어 사전에 따르면 관심을 끄는 사람이나 주위에 관심을 끌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말을 하여 이목을 중심시키게 만드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정서는 혐오인데 아이들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이 없다 보니 관종이 관심을 원하니까 관심을 줘야 하는 사람으로 이해 되나 보다. 아이들에게 친구가 관종이라는 말은 친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 언어에는 친구의 행동이 ‘옳다’, ‘그르다’ 혹은 ‘싫다’, ‘좋다’라는 평가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단어를 하나 더 배웠다.
며칠 뒤, 국어 시간에 자신이 현재 느끼는 감정과 이유를 발표하는 수업을 했다. 조용하고 항상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윤우가 설레인다고 대답했다. 과묵한 윤우를 설레이도록 만든 엄청난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나도 아이들도 흥미진진해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 오늘 급식이 뭐가 나올까 생각하면 설레요.”
나도 아이들도 순간 빵 터졌다. 윤우는 아이들의 웃음에 놀랬는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늘 다른 친구들을 배려하고 감정의 기복이 없어서 마냥 성숙한 줄로만 알았는데윤우에게 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이 반짝하고 드러났다. 윤우가 민망해할까 봐 얼른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 윤우야, 비웃은 것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선생님도 급식 시간이 정말 좋은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여러분, 윤우는 일상생활에서 설레이는 것을 찾아냈어요. 급식 시간은 매번 있으니까 윤우는 매일매일 설레이겠어요. 여러분도 윤우처럼 매일매일 설레일 만한 것들을 찾아냈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윤우에게 설레려면 무언가 대단한 일이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그동안 ‘설레다’라는 말은 평범한 나의 삶에는 속하지 않다고 여겨 거리감을 느꼈다.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특별한 그대같은 느낌이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단어가 확 내 일상생활에 들어와 버렸다. 나 역시 급식 메뉴를 궁금해하며 설렜다. 그리고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만한 수업 자료를 발견하면 신나할 아이들을 상상하며 가슴이 설렘으로 가득찼다. 알림장 검사할 때 아이 얼굴을 그려주며 ‘사랑해’라고 쓰면서 기뻐할 아이의 반응을 기대하며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다.
고만고만한 일상인줄 알았는데 곳곳에 ‘설레다.’가 내 삶을 찬란하게 빛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섹시하다’, ‘관종’, ‘설레다’가 이토록 아름다운 단어였다니! 오늘도 아이들에게 단어들을 다시 배워 나간다. 앞으로 어떤 단어들을 아이들이 가르쳐줄지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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